안녕하세요? Nikki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카타콤이 무엇인지, 그리고 카타콤이 생겨나게 된 원인을 함께 알아보았는데요,
오늘은 카타콤의 역사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합니다. 이 카타콤은 도대체 언제부터 시작되었고, 어떤 과정을 거쳐왔을까요? 역사라서 지루할 수 있지만 놓치지 말고 함께 로마의 과거로 떠나봅시다.💃
제 2장 카타콤의 역사
기독교 박해기의 카타콤
1세기 : 1세기 무렵 초기 기독교인들은 대체로 경제력이 없는 가난한 계층이었기에 공동묘지가 따로 존재하지는 않았습니다. 순교자들을 비롯한 기독교인들은 대부분 야외의 무덤에 이교도들과 함께 묻히곤 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도 순교한 뒤에 바티칸 언덕에 있던 공동묘지에 이교도들과 함께 묻혔으며, 사도 바울도 오스티아 가도의 공동묘지에 이교도들과 함께 묻혔습니다.
2세기 : 기독교인들은 자신의 공동묘지에 순교자와 신자들을 매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초기의 로마 카타콤은 당시 유력가문의 이름을 지니고 있었는데 기독교가 중, 상류의 부유한 계층에까지 전파되면서 이들이 자신의 가족공동묘지를 신자들에게 개방해 형성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3세기 : 이때부터는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더욱 강화되었는데요. 그 전까지는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일부 지역 차원에서만 이루어졌지만 데키우스가 왕위에 오른 뒤에는 로마 제국 전역에서 기독교 박해가 행해졌습니다. 데키우스는 250년 1월에 모든 시민에게 로마의 신을 경배하고 행정관이 보는 앞에서 신성한 제물을 바치라는 포고령을 선포하였습니다. 그 후 발레리아누스 황제도 257년 칙령으로 기독교인의 묘지 출입과 집회 금지를 선포하였고, 그 결과 기독교인은 장례 때문이라고 해도 카타콤에서 모이는 일이 금지되었습니다.
그러나 박해가 심해질 수록 기독교인들은 박해를 피해 카타콤으로 더 많이 모여들었고, 순교자들의 시신도 비밀리에 카타콤으로 옮겨져 매장되었기 때문에 카타콤의 규모는 오히려 커졌습니다.
사람들은 병들어 죽었고, 그 중에서 파우스투스와 유세비우스와 카이레몬 등의 집사들이 살아남았다. 유세비우스는 처음부터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힘을 얻었고, 감옥에 갇혀 있는 신앙 고백자들에게 대한 의무를 뜨거운 열정으로 수행하며 복된 순교자들을 매장하는 위험한 일을 행할 자질을 갖추고 있었다. 지금까지도 총독은 잔인한 방법으로 신자들을 죽이고 있다. 그는 신자들을 심문할 때에 어떤 사람들에게는 매질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감옥에 가두고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하라고 명령했으며, 혹시 접근하는 사람이 있는지 조사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형제들의 민첩함과 친절을 통해 고통 받는 형제들에게 어느 정도의 위로를 주셨다. -유세비우스의 [교회사] 중,
*성체성사: 미사 때 축성된 빵과 포도주를 받아먹는 의식
4세기 초 :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때에는 제국 전역에서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더욱 극심했습니다. 그는 303-304년 4개의 칙령으로 기독교도들의 묘지와 재산, 교회, 서적들을 모두 없애버렸습니다. 이때 초기 교회의 기록들이 불태워지고, 수많은 교회와 순교자들의 묘지들이 파괴되었지요.
그러나 갈레리우스 황제가 즉위한 311년 4월 30일,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는 칙령을 공포하였고, 오랫동안 박해받던 기독교는 드디어 종교의 자유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313년 2월, 콘스탄티누스와 리키니우스 황제가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에 대한 관용을 선포하며 기독교가 정식 종교로 인정받았습니다. 밀라노 칙령은 로마 제국 내의 모든 사람에게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고 특히 기독교인들에게 교회를 조직할 권리를 포함하는 법적인 권리를 보장해 주었고, 기독교 박해 시대에 몰수한 교회의 재산을 돌려주고 이에 대해 국가가 충분한 보상을 주도록 했습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325년 제1차 니케아 공의회를 소집하여 동,서방 교회의 교리와 조직의 통일에도 기여했어요. 이후 로마의 황제들은 니케 여신상을 없애고 그에게 제물 바치는 관습을 폐지시키고, 이교 신전을 모두 헐며 비밀리에 이교 신전을 참배하는 것도 금하며 기독교가 실질적인 국교가 되도록 했습니다.
기독교의 공인과 카타콤
4세기 중후반 : 카타콤은 기독교의 공인과 국교화로 다시 교회의 품에 돌아왔으며, 순교자의 묘역으로 복원되었습니다. 그리고 카타콤을 성지로 선포하고 신자들에게 이곳을 순례하도록 했습니다.
카타콤들은 모두 교회의 공적인 재산으로 인정을 받아 복원되었으며, 교회는 순례자들을 위해 성인과 순교자들의 무덤을 찾아 묘비명을 썼다고 해요. 이제 기독교인들은 자유롭게 토지를 매입하여 교회를 설립할수 있었으므로 교회는 지하에서 지상으로 올라오게 되었습니다. 무덤도 자유롭게 만들 수 있었으나, 기독교인들은 성인과 순교자들 가까이에 묻히고 싶은 마음에 계속해서 카타콤에 무덤을 만들었고, 오히려 이 시기에 더 큰 규모로 카타콤이 확장 되기도 했다고 합니다.
5세기 이후 : 그러나 5세기 이후 이민족의 침략이 잦아지면서 카타콤에 묻혀 있던 주요 성인과 순교자들의 유해가 약탈을 피해 교회 안으로 옮겨졌고, 지하묘지는 점차 상징적인 공간으로만 남게 되었습니다. 로마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그의 금붙이나 패물을 함께 묻는 풍습이 있었기 때문에 무덤은 이민족들의 중요한 약탈 대상이 되었습니다.
8-9세기 : 교회는 이민족의 약탈과 도굴꾼들로 인해 성인과 순교자들의 유해가 파괴될 것을 우려하여 8-9세기에 카타콤에 있던 그들의 유해들을 성 안의 성당으로 옮기도록 했습니다. 이들의 유해를 안치하기 위해 과거 신전이었던 유적들을 성당으로 개조하거나 성당을 새로 신축했고 이 때문에 로마에는 8세기에서 9세기 사이에 새로 건축된 성당들이 많다고 합니다.
9세기 초에는 성인과 순교자의 유해 이전이 대부분 완료되면서 순례자들의 발길도 점차 뜸해지기 시작했고, 카타콤은 점차 사람들에게 잊혀져 갔습니다. 세월이 지나 지진 등을 겪으며 흙이 무너지고 초목이 무성해지면서 입구들마저 흙으로 덮여 찾지 못하게 되어버렸습니다.
카타콤의 재발견
15-16세기 이후 :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졌던 카타콤은 르네상스로 고전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15~16세기 이후 다시 사람들의 주목을 끌어 발굴이 시작되었습니다. 카타콤 연구를 대표하는 인물로 꼽히는 ‘안토니오 보시오’는 로마 주변에서 30여 개의 카타콤을 발굴했고, 그의 발굴로 카타콤은 다시 사람들의 눈앞에 나타났으나, 발굴 이후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벽화과 파손되고 석관이 열리는 등 도굴꾼들에게 크게 훼손되기도 했습니다.
19세기 이후 : 고고학과 역사학, 종교학 등 다양한 측면에서 카타콤의 의미가 재조명 되면서 카타콤 탐사와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특히 ‘지오반니 바티스테 데 로시’는 카타콤 연구를 획기적으로 발전시킨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성 칼리스토 카타콤에 대한 발굴을 주도하여 이곳에서 기독교 박해기에 순교한 교황 9명과 주교 8명의 무덤과 체칠리아 성녀의 무덤을 발견했습니다. 그의 카타콤 발굴과 연구 작업은 카타콤의 중요성을 다시 알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1853년에는 ‘교황청 고고학 위원회’가 설립되어 카타콤에 대한 연구와 발굴이 더욱 체계적으로 추진되었고, 1925년에는 ‘교황청 기독교 고고학 연구소’가 설립되었습니다.
이 기관들을 중심으로 기독교 고고학 연구가 발전되면서 카타콤에 대한 발굴과 연구도 지속적으로 전개되어 지금까지 로마 주변에서만 모두 60여 곳의 카타콤이 발굴되었다고 합니다.
🤔 그런데 로마에서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가장 심하던 시기에서 어떻게 국교로 전환이 되었을까?
로마에서 기독교가 국교로 전환된 과정은 여러 역사적 사건과 인물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밀라노 칙령이 발표되기 전, AD 64년부터 313년까지 249년간 기독교 박해가 지속되었고, 로마는 황제의 자리를 놓고 벌어지는 내전으로 혼란에 빠져 있었습니다. 특히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치하에서 기독교 박해는 절정에 달했습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황제가 되기 전까지 디오클레티아누스의 하위에서 기독교를 강하게 박해하는 정권을 지켜보았으며, 그 당시 자신의 종교적 입장을 명확히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왜 콘스탄티누스는 황제가 된 후 기독교를 인정하게 되었을까요?
그의 종교적 신념에 대한 명확한 기록은 없지만, 많은 역사학자들은 그가 기독교를 정치적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했다고 주장합니다. 콘스탄티누스는 아들과 아내를 잔혹하게 처형하는 등 권력을 위해 비정한 행동을 했기에, 그를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보기 어려운 견해도 존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사건이 발생합니다. AD 312년, 콘스탄티누스는 군대를 이끌고 로마 북부의 티베르강을 가로막은 밀비안 다리에서 전투를 치르게 되며, 이 전투는 그의 기독교 신앙과 정치적 방향성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 전투가 있기 전 콘스탄티누스는 정오가 막 지났을 무렵 하늘에서 이상한 물체를 보았다고 한다. 그것은 빛나는 십자가로, 거기에는 ‘엔 투토이 니카(Εν Τούτῳ Νίκα)’라는 그리스어 문구가 아로새겨져 있었다. 이 문구는 “In Hoc Signo Vinces(이 증표 안에서 승리하리라)”는 라틴어로 더 널리 알려져 있다. "
콘스탄티누스는 꿈에서 구세주가 낮에 본 것과 동일한 형상의 깃발을 들고 나타나, "이 깃발을 만들어 전쟁에 나가면 승리할 것이다"라는 음성을 듣습니다. 그는 기독교 지도자들을 불러 하나님과 자신이 본 십자가에 대해 물었고, 이 과정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얻게 됩니다. 이후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로의 개종을 선언하고, 꿈에서 본 십자가를 제국의 깃발로 사용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는 이 심볼을 병사들의 방패에 그려 넣고 전투에 나서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이 상징은 그리스 알파벳 중 '카이(Χ)'와 '로(Ρ)'를 합친 것으로, '그리스도'라는 단어의 앞 두 글자입니다. 이 심벌은 나중에 가톨릭 교회의 상징으로도 사용됩니다.
결국 밀비안 전투는 콘스탄티누스의 대승리로 끝났고, 그는 서로마 제국의 황제로 정식 등극하게 됩니다. 이 승리는 로마 제국 내에서 기독교가 공인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고, 313년에는 밀라노에서 기독교인들에게 자유를 부여하는 밀라노 칙령을 발표합니다. 이후 콘스탄티누스는 324년 로마 제국 전체를 다스리는 단독 황제가 되었습니다.
오늘은 카타콤의 역사에 대해 살펴보았는데요, 여러분들은 어떠셨나요?
카타콤의 역사와 초대교회의 신앙 여정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가 항상 우리와 함께하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과 믿음을 잃지 않고 나아간 그들의 모습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큰 교훈이 됩니다. 여러분도 각자의 삶 속에서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을 발견하고, 그분의 사랑을 경험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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